제이의 끄적이는 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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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논단] 민희진 태풍에 소환된 사진 한 장
민희진 태풍은 많은 것을 까발렸다. 위선과 가식 따위 사전에 없는 이 덕분에 많은 것들을 솔직하게 들여다보게 됐다. 내 경우, 사진 한 장에 버튼이 눌렸다. 하이브 리더들 사진인데 11명 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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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희진 태풍은 많은 것을 까발렸다. 위선과 가식 따위 사전에 없는 이 덕분에 많은 것들을 솔직하게 들여다보게 됐다. 내 경우, 사진 한 장에 버튼이 눌렸다. 하이브 리더들 사진인데 11명 전원 남성이다. 알고보니 2021년 하이브 회사 설명 영상에 등장한 임원들로 이미 당시에도 '남성천하'라고 비판받았던 사진이다. 저 사진은 '개저씨 천지'로 박제되어 소셜미디어에서 화제다.
저 문제적 사진이 구린 줄 모른다면 그게 그 조직의 위기다. 기업이든, 정부든, 정당이든, 대학이든, 컨퍼런스든 최소한 글로벌에서는 저런 사진 감히 못쓴다. '패널' 대신 '매널(남자 패널)'만 있는 행사는 강연자와 토론자들이 먼저 보이콧한다.
하이브는 '남성천하'를 부끄러워하거나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2021년 저 사진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 2023년 12월 상근 임원은 남성 9명 여성 1명이다. 남녀 평균 임금이 각각 7600만원, 5100만원으로 그 업종에서 남녀 임금 격차가 가장 큰 것도 하이브란다. 소녀들을 앞세워 걸그룹 비즈니스를 하면서 말이다.
민희진 어도어 대표의 공과(功過)를 다 떠나서, 저 아재들과 다른 관점에서 역량을 발휘해온 것은 분명하다.
과거 손석희 대표가 진행하던 jtbc 신년토론 홍보 사진에 역시 황망했던 기억이 있다. 연례행사인 신년토론에는 매번 나이 든 남자만 등장했다. 정치, 사회, 경제, 언론 등 한국 사회 전망은 뭐든 '아재' 몫이라니 이상하지 않은가? 몇년 전 '그 많던 여성들은 어디로 갔을까'라는 제목으로 유튜브 강연까지 하게 된 배경이다. 명색이 언론사인데 일부러 여성을 배제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 심각하다. 배제와 차별이 벌어졌는데 인지하지 못했다면 무능한 거다.
다양성 부재는 단순히 사진이 후진 문제가 아니다. 끼리끼리 모이면 일을 망치기 쉽다. '동일한 배경을 지닌 똑똑한 사람들이 의사 결정 그룹에 배치되면 집단적 맹목 현상'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영국 정부가 세제 개혁을 추진했다가 수십만명이 거리 시위에 나서게 만든 사건은 1980년대에 벌어졌다. 다들 이해할 수도, 수용할 수도 없는 구상을 개혁이랍시고 내놓았다. 대체 왜 그런 판단을 한 거지? 책임자들은 모두 부유한 명문가 자제들이었다.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 출신이었다. 영지에서 꿩 사냥을 하고, 카드게임과 파티를 즐기는 이들이었다. 똑똑한 그들은 협업도 좋아했다. 그런데 다 같은 부류였다. 자기들끼리 현명하다는 착각에 빠졌다. 그들은 보통 사람을 보지 못했고, 이해도 못했다.
이 에피소드는 영국 기자 매슈 사이드가 쓴 <다이버시티 파워>에 등장한다. 유유상종, 지들만의 세상에 사는 잘난 인간들만 모이면 리스크다. 기업도 그렇지만 정부 운영 사례가 가관이다.
남의 나라 이야기, 강 건너 불은 아니다. 우리 정부를 들여다보자. 법대 나온 검사들끼리 뭐든 다하면 구멍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른바 '관점의 사각지대'가 생기기 때문이다.
사실 비슷한 배경에 비슷한 관점을 가지면 다 같이 놓치는 부분이 있게 마련이다. 불완전한 관점들은 서로 보완해야 통찰력을 얻는다. 즉 어느 조직이든 구성원의 다양성을 확보하지 못하면 '눈 먼 상태'로 일하게 된다. 이게 우리 일상에 보이지 않는 영향을 미친다.
영국의 저널리스트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는 <보이지 않는 여자들>이라는 책에서 여자들이 어떻게 지워졌는지 추적했다. 피아노 건반이 남자들의 평균 손 크기에 맞춰서 설계된 덕분에 여자들은 곧잘 '손을 찢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지 않았던가? 자동차 사고를 당했을 때 여자가 크게 다칠 확률도 남자보다 47%나 높다. 차 에어백조차 성인 남자를 고려해 설계된 탓이다. 적정 실내 온도도 남자 기준이라 여자들은 에어컨 추위를 피해 가디건 하나씩 사무실에 두고 다닌다.
민희진 대표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엇갈리는데, 혹여 '여자가 감히', '여자가 어찌', 종류의 오해는 사양한다.
동물다큐 감독 루시 쿡은 <암컷들>이라는 책에서 '암컷은 수줍음이 많다', '암컷은 수동적이다' 같은 오래된 착각을 시원하게 깨부순다. 빅토리아 시대의 다윈이 만든 프레임이 21세기에도 여전한 것에 의문을 가진 그는 온 대륙을 누비며 암컷을 재발견했다.
책의 부제는 '방탕하고 쟁취하며 군림하는'. 책의 표지는 암사자인데, 발정기에 다수의 수컷과 하루 최대 100번까지 짝짓기 한 이야기가 나온다. 저자는 학교에서 성적 방종이 수컷의 생물학적 책무인 것처럼 배웠지만, '그렇게 모든 암컷이 조신하다면 대체 수컷들은 누구와 섹스를 한 것이냐'고 질문한다. 학자들은 20세기까지 암컷 연구를 제대로 하지도 않고, 암컷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꼰대 소리만 했다.
민희진 태풍이 지나간 자리가 폐허로 남지 않으려면 우리가 한쪽 눈으로만 보는 것을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여겨온 과거를 찬찬히 돌아봐야 한다. 이제 온통 아재들만 나오는 사진은 함께 손가락질이라도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