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Writing (22)
제이의 끄적이는 나날
올 겨울엔 롱부츠를 신고 싶어서 블프 기간에 하나 샀다. 함께 입으려고 스키니도 샀다. 살이 불어나서 못 입는 바지 많이 처분해 놓고는... 서울행, 부츠를 개시했다. 종아리가 꽉 켜서 피가 안 통하는 것 같다. 기차 시간이 촉박해 조금 달렸더니 다리가 금세 저려 온다. 스키니도 함께 입었다. 점심에 난 밥을 조금만 먹겠지. 딱 붙고 끼는 옷을 오랜만에 입는다. 몸은 불편하지만 모처럼 (평소 잘 안 입는)도시 여자 스타일이라 기분은 좋다. 다시 서울로 돌아와서 출퇴근을 하면 체중은 원래대로 돌아갈 것 같다. 자주 끼는 옷을 입고 밥도 적게 먹을 테니깐. 그런데 난 지금이 좋다. 평소엔 편하게 지내다 가끔씩 조이는 옷을 입는 것도 괜찮다. 살이 빠지면 옷이 널널해질 테지만 난 식단 조절을 할 계획은 없다...
(지난 일기를 보니 우울함에 끄적거렸던게 분명한데 일기는 기분이 안 좋을 때 더 쓰고 싶나보다) 요며칠 나를 괴롭히던 고민이 있다. 그놈의 알바, 그리고 직원. 하필 읽고있던 책 내용 중에서도 현대에는 신분 제도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노예'는 존재한다는 의미의 대목을 보았던 터였다. 일터에서 받는 대우가 마치 신분 차이를 느끼게 했고(황당) 나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근 일주일을 고민했을까, 사실 더 오래 고민했지만 최근엔 꽤나 골칫덩이처럼 느꼈다. 그리고 이렇게 신경이 쓰일바엔 차라리 관두자고 생각했다. 일을 하면서도 마음이 굉장히 혼란스러웠고 홀로 끙끙거리다가 '그래도'라는 마음으로 과장님께 면담을 신청했다. 내가 느꼈던 감정과 문제점에 대해 잘 말했는지, 그는 제대로 이해했는지, 내가 이 말을 ..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다. 해도 길어졌겠다, 어제와 그제는 아침 운동도 패스했겠다 오늘은 유달산 둘레길 걷뛰를 하기로 약속한 날이다. 7시를 조금 넘어 출발을 했고, 돌아오는 길 집 근처 방앗간에서 가래떡을 샀다. 씻고 나와 천천히 아침을 먹었는데도 9시 30분, 아주 여유로웠다. 그다음 순서로 번역 과제를 뒤적거리다가 외출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섰다. 알바를 구하고 있는 요즘 마침 집 근처라 가깝고 스케줄도 적당한 곳에 구인 공고가 올라왔기 때문이다. 면접을 보는데 내가 장점이라고 생각했던 부분이 타인의 시선에서는 단점으로 비쳤다. 무엇이든 상대적이라는 표현이 딱 알맞다. 담당자는 굉장히 부지런하게, 그리고 열심히 또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오래 일할 수 있는 안정적인 사람을 찾는 중이었고, 생각 정..
돌고 돌아 다시 5년간 다니던 회사를 퇴사하고 잠시 휴식을 갖기로 했다. 쉬면서 내가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에 관하여 생각해 보고 싶었다. 원래 계획은 퇴사가 아니라 이직이었다. 다달이 들어오는 월급과 어느 범위 안에서 원하는 만큼의 소비를 할 수 있는 생활이 싫지 않았다. 다만 회사에는 넌덜머리가 났다. 경력을 완전히 변경해 볼까 아니면 다른 듯 비슷한 분야를 더 찾아볼까 고민하며 구직 사이트를 들여다봤다. ‘이런 마음이라면 지금 다니는 회사와 다를 게 뭘까’, ‘직장, 사람, 업무의 변화가 전부일까? 시간이 지나면 결국 같은 이유도 매너리즘에 빠지는 건 아닐까’. 내가 원하는 게 맞는 것인지 또 무엇인지 쉽게 결정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급하게 이직하기보다는 잠시 쉬어가는 시간을 갖는 게 낫겠다고 판..
잠시만 안녕 중국에 다시 가겠다는 일념으로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두 번의 도전 끝에 상하이의 한 공관에서 6개월간 인턴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정말 원해서 간 중국이었지만 졸업을 한 상태였기에 진로 고민도 컸다. 종료일이 다가올수록 마음은 조급해졌다. 현지에 남아 취업을 할 것인지, 돌아갈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비자도 만료되고, 경제적인 상황도 불안정했던 나는 한국을 선택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인 초청을 하는 업무로 기획사에 취직했다. 우선 돈을 벌고 싶었다. 인턴을 가기 전처럼 단기 알바를 전전하며 취업 준비를 병행하기는 싫었다. 대학 등록금까지는 당연하게 지원받아 생활했지만 졸업도 한 상황에 부모님께 계속 도움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중국어 공부를 더 하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먼저 경제..
인연의 시작 복수 전공으로 중어중문학을 택한 건 우연이었을까? 다니던 대학은 2학년이 되기 전 전공 심화나 복수 전공 등 추가 과정을 선택해야 했다. 경험도 부족했고 하고 싶은 것도 좋아하는 것도 알지 못했던 1학년의 나는 주변에서 대세 언어라고 말하는 중국어로 제2전공을 선택했다. 첫 학기 수업은 쉬웠다. 두 번째 학기도 그럭저럭 보냈다. 그런데 학기가 거듭될수록 진도도 학생들 수준도 배로 빨라졌다. 어느 정도 언어 실력을 갖춘 학우와 방학 때 놀다가 다음 학기 수업에 벼락치기로 임하는 나와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학업뿐 아니라 인간관계와 취업 고민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쌓여서 답답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환경에 변화를 주고 싶은 마음에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지원했다. 처음에는 영어권 국가를 가고 ..
추석을 맞아 오랜만에 서울에 갔다. 지나간 여름과 다가오는 겨울 준비를 위한 짐 정리로 큰 캐리어와 함께였다. 한창 무화과 철이라 가족들 줄 생각으로 스티로폼 박스도 가지고 있었기에 곧장 집으로 가는 편이 나았다. 다만 친구들과 일정을 조율하다 보니 적당한 날이 당일뿐이어서 최대한 역 근처로 약속을 잡았다. 만남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시점, 친구의 한 마디가 나를 자극했다. “짐이 있으니까 아버지께 연락드려봐.” 옆에서 또 다른 친구도 거들었다. “그래, 혼자 가져가기 무겁잖아.” 나는 괜찮다고, 혼자 갈 수 있다고 대답하면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아빠에게 연락을 했다. 사실 알고 있었다. 그가 오늘 등산하러 가는 스케줄이라는 것도, 서울 시내로 마중을 나오는 일은 좀처럼 없다는 것도. 역시나 예상한..
대학 졸업을 하고도 계속 해외에 나가고 싶었던 나는 해외 인턴 사업으로 6개월간 중국 상하이에서 생활했다. 한 달 80만 원 정도의 급여와 비자, 왕복 항공권을 지원해 주는 프로그램이었다. 살 곳은 스스로 구해야 했기 때문에 일주일간 유스호스텔에 머무르며 부동산을 들락거렸다. 약간의 부푼 기대와 빨리 집을 구해야 한다는 급한 마음으로 몇 군데를 둘러보았다. 겉보기에는 멀쩡한 아파트같이 생겨서는 내부에 들어가면 개미 소굴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는 고시원 같은 집, 낡아서 걸을 때마다 삐걱 소리가 나던 으스스한 나무 바닥 집, 예쁘고 깔끔하지만 월세가 비쌌던 집을 지나쳤다. ‘집 구하는 거 쉽지 않네’ 막막함에 잠이 안 오던 밤, 다시 클릭해 본 사이트에 눈에 들어오는 한곳이 있었다. 다음날 퇴근 후 바로 발걸..
나에게 집중 2021년은 두 번째 터닝포인트라 할 만큼 생각에도 삶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상반기에는 첫 퇴사를 하고 하반기에는 목포에서 본격적인 독립생활을 시작했다. 퇴사 직전 달인 3월만 해도 정말 그만둘 수 있을지조차 상상할 수 없었는데, 사람 일은 이리도 예측할 수가 없다. 혼자 지낼 수 있는 작은 공간이 있고, 나에게 집중하며 사는 현재의 삶은 만족도가 높다. 의도하지 않아도 나의 관심은 바깥에 더 쏠려있었다. 주변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중심을 안으로 세우려면 고의적인 시선의 차단도, 스스로의 노력도 필요했다. 누군가와 같이 있을 때는 자연스럽게 그 사람에게 집중하게 된다. “배려”라고 생각했는데 그 배려가 서로에게 좋은 것인지 생각해 봤다. 물론 상대방에겐 좋을지도 모른다. 나에게도 좋은..
[퇴고] 내 나이가 어때서 열 살 넘게 차이가 나는 친해지고 싶은 사촌 언니가 있었다. 아빠가 장남이었기 때문에 주로 친할머니 댁에서 이틀을 보내고 명절 당일이나 그다음 날 외할머니 댁에 방문하곤 했다. 외가 쪽 친척이던 언니를 만날 수 있는 날은 보통 명절이었다. 그런데 서로의 큰집은 달랐기에 자주 시간이 엇갈렸다. 또 언니의 부모님인 이모와 이모부는 명절 때마다 뵈었는데 언니는 거의 오지 않았다. 이번에는 언니가 오는지, 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지 물으면 언니는 농담조로 결혼하라는 성화를 듣기 싫어서라고 답했다. 그 당시엔 언니를 못 본다는 사실에 섭섭한 마음이 들 뿐이었다. 주변에서 흔히 말하는 결혼 적령기의 나이, 20대 후반을 향할 무렵부터 언니의 마음을 점점 더 이해할 수 있었다. 어릴 적 명..